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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성도가 사는 법(8)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는 말씀
2025-03-29 09:09:48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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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성도가 사는 법(8)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는 말씀

벧후 1:19-21

250323주일낮설교

한 병원의 지하 병동에 어린 소녀가 있었다. 늘 술에 취해 가족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와 결핵을 앓는 어머니 사이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심한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 소녀를 돌보던 친척들은 그녀를 메사추세츠 주립 병원에다 버렸다. 어두컴컴한 병원 한구석에 격리 수용된 소녀는 사람들이 다가올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사납게 굴며 자신을 방어했다. 의사들이 소녀를 고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이 소녀 앞에 은퇴한 늙은 간호사가 찾아왔다. 그 간호사는 소녀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소녀를 돌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다. 그러자 어린 소녀의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어두움이 서서히 걷히면서 사람과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의료진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소녀는 점점 회복되었고 결국에는 정신 질환까지 치유되었다. 늙은 간호사의 헌신적인 사랑의 돌봄과 그녀가 전한 예수님으로 인해 소녀의 마음에 자리 잡았던 어두움이 완전히 사라졌고 소녀는 자신과 같이 아프고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헌신했다. 이 소녀가 바로 시청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사회 운동가로 인권운동가로 교육자로 세상 가운데 영향력을 미친 헬렌 켈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끈 앤 설리번 메이시 였다. 세상의 다른 것으로는 치유되지 않을지라도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무질서와 어둠으로 가득 차있고 영적으로도 죄악이 가득하고 미움과 분열이 난무하고 있다. 이단도 이제는 드러내 놓고 자기들의 종교에 대해서 포교하고 있다. 인본주의 사상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미혹하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이어도 우리는 세상의 흐름과 관계없이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다. 어둠과 빛이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빛 되신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어둠이 물러가게 해야 한다. 말씀위에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어둠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도 어둠을 물리치는 것은 말씀이라고 하면서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주시는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과 같다.

 

본문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앞의 17-18절 말씀에서 베드로는 변화 산에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음성을 직접 들었는데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계시였다. 베드로는 이러한 환상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 확신했다.

그러나 이런 확실한 예언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성경말씀이다.

19절에서는 성경말씀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기가 목격한 놀라운 환상보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갈 때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두운 데를 비추는 이라고 했을 때 어두움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말할 수도 있고 또 죄악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본성을 말하기도 한다.

빛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할 때에 우리는 세상에서 방황하는 인생이 아니라 분명하고 온전한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 심령이 어둠으로 가득 차 죄악 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를 먹고 마실 수밖에 없지만 말씀이 우리 심령을 비출 때 비로소 온전한 길을 걸어 갈 수 있다.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온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맹인이 밤에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맹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맹인인 자신은 눈이 안보이므로 밤이나 낮이나 상관없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보고 부딪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기가 불을 켜고 다니면 사람들이 그 불을 보고 자기를 피해 가겠지 하는 생각에 맹인은 등불을 켜들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혀서 이마가 상하게 되었다. 그는 화가 나서 나는 맹인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당신은 왜 이 등불을 보고도 들이받고 있냐고 따졌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이 꺼진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맹인이 불쌍한 것은 빛을 보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어둠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칠 흙 같은 어둠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할 수밖에 없다.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걸어가지만 불이 꺼져서 어둠이 되어버린 말씀의 등불을 들고 빛이 꺼진 줄도 모르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문명의 이기로 인하여 요즈음은 영상으로 다 제공해 주기에 성경책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 화면을 보거나 아니면 핸드폰을 가지고 성경을 찾고 있다. 꼭 책으로 된 성경책을 가지고 다녀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성경책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은 들고 다니는 책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설교 본문을 보기 위해서만 필요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므로 말씀을 통하여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기를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성경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을 비추는 빛이 되는 줄 믿기 바란다. 말씀의 등불을 밝혀서 우리의 걸어가는 길이 믿음의 온전한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만 밝은 등불 아래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을 위해 등불지기가 됨으로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사명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루 중에 가장 어두운 때는 아침 해가 뜨기 전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르기 까지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되기 전을 말하고 이때가 영적으로 가장 흑암기라고 할 수 있다. 말세 지말 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어두움을 이기고 흑암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사탄의 간계를 물리치고 어둠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우리의 믿음을 세워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본문 20-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1)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다. 표준 새 번역에서도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록한 기록자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어떤 책에서는 마태복음의 저자를 마태라고 기술했는데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성경의 원 저자는 성령하나님이고 그것을 기록한 사람은 저자가 아니라 기록자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저자는 성령하나님이시고 마태는 마태복음의 기록자다.

그러면 마태는 마태복음을 어떻게 기록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것을 마태가 받아쓰기 하듯이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경관은 유기적 완전 축자 영감 설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인 표현인데 설명하면 유기적이라는 말은 성령하나님께서는 성경 기록자들의 모든 조건을 활용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13권을 기록했는데 바울은 당시 헬라의 학문을 습득했고 또한 당대의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서신 서들을 보면 매우 논리적이고 수사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오고 문체도 고급스럽다. 그에 반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베드로 서신을 쓰고 있는 베드로는 어부로서 일반적인 직업이었고 학적으로도 낮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을 볼 때 문체나 표현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 서신은 성령의 감동이 더했고 베드로 서신은 성령의 감동이 미흡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울로 하여금 신학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로마서를 통해 기록하게 하셨고 베드로 서신을 통해서는 위기에 처해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다.

그래서 성령은 성경의 기록자들의 모든 것을 활용하셔서 글을 쓰게 하시되 그들을 감동 시키시고 그들이 쓰는 한자 한자에 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게 하셨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완전 축자 영감이라고 말한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우리의 성경관은 유기적 완전축자 영감 설을 취하고 있으므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교단이 다 이런 우리와 같은 성경 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던 우리의 성경관은 모든 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기 바란다.

 

2)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생각에 치우쳐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20절에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했다. 표준 새 번역에서는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성경해석은 처음에 성령께서 성경의 기록자들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신학을 공부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의 의미를 알려고 힘써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본문 한절만 가지고 무슨 뜻인가를 알기를 힘쓰기 보다는 문맥을 통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해되는 부분만 이해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풀지 말고 그냥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깨닫게 되기도 하고 아니면 설교를 통해서든지 성경공부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을 처음에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지고 성경을 계속 읽다보면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만 성경 전체를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 그 말씀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깨닫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말씀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심령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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