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세상에서 성도가 사는 법(3)
성도가 갖추어야 할 내면적인 성품
벧후 1:5-6절
250216주일낮설교
로마 바티칸 궁에 ‘피에타’라는 조각 작품이 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인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이 저미는 아픔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고 3년간에 걸쳐 조각한 작품이다. 피에타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교황과 여러 추기경과 귀족들이 피에타 제막식에 모였다. 모든 사람들이 피에타 상에 압도 되고 말았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위대한 예술가요’라고 치하했다. 교황의 치하에 미켈란젤로는 ‘교황 성하, 피에타상은 제가 조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신이 이미 대리석 덩어리 안에 만들어 놓으신 피에타상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곁에 붙은 부스러기를 제거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피에타’는 ‘경건한 마음’이라는 의미다. 피에타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말을 빌려 ‘경건’이라는 말을 해석해 보면 ‘온갖 죄와 탐욕으로 얼룩진 모습을 닦아내고 다듬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담아 두신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경건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은 훈련으로 이루어지기에 날마다 경건의 연습을 하여 경건한 삶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경건의 훈련 과정에 중요한 요소가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다.
지난주에는 신성한 성품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을 권면하면서 먼저 기본적인 성품으로 믿음과 덕을 살펴보았다. 믿음에는 내적인 부분과 외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믿음과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늘 함께 존재해야하고 그럴 때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행함을 벧후 1:5절에서는 믿음에 덕을 이라고 말씀하여 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덕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도덕적으로 선한 삶이라고 말씀드렸다.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하기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짐을 서로 져주어야 함을 말씀 드렸다.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기려고 바둥거리며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오늘 본문에서는 기본적인 성품위에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주의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1. 선한 삶의 방향으로 지식을 말씀한다.
본문5절 “덕에 지식을”
여기서 지식은 벧후1:2절에서 말씀하는 앎으로라는 말과는 다른 뜻이다. 벧후 1:2절의 안다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본질로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2절의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아는 지식을 말한다. 그러나 본문 5절의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5절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을 행하고자 힘쓰는 그 지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며 기뻐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어드리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수준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엡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인격이 있다. 그래서 사람도 창조하실 때에 우리 가운데 인격을 주셨다. 인격이라는 것은 알고 느끼고 행동하는 지정의를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을 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신앙이 맹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성경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시고 신이시기에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거나 알 수 없다. 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 역시 다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된 것이고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나 성경의 내용은 이해되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전부 다 알 수 없기에 성경에서 계시되고 있는 것만 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알기를 힘써야 할 것이고 성경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들 중 이해되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미지수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을 통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영향으로 모든 만물에 신이 있다고 여겨 여기저기에 빌었다. 산에는 산신령이 있고 오래된 나무에도 신이 깃들여 있고 물에도 그렇다고 여겨 제사를 지냈다.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삼신할머니까지 만들어 정한수 떠놓고 목욕재개하고 새벽에 빌면서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이 모든 것에 있는 신이 어떤 신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저 정성을 드리면 된다는 막무가내 신앙이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확신하고 그 하나님을 찾으며 신뢰해야 한다.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럿 나오는데 그것은 신앙의 선조들이 그들의 삶속에서 체험적으로 만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쳐야 하는 괴로운 순간 순종했을 때 나타나셔서 양을 준비시켜 놓으시고 아들 이삭 대신에 제물로 드리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그 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모세도 마찬가지고 다윗이나 기드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도 추상적인 하나님에 대해 맹목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체험되어진 확실한 하나님을 부르며 의지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으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구원받아 믿음을 가진 성도는 믿음에 합당한 행위로 본문에서는 덕을 말씀하는데 덕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선한 삶이라고 말씀 드렸다. 그러면 믿음을 가진 성도의 선한 삶이 온전해지도록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덕 위에 쌓여야 한다. 지식은 선한 삶의 온전한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절제는 선한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
6절 “지식에 절제를”
절제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다이어트를 위해서 음식을 절제하고 운동을 한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않고 자제하는 것도 건강을 위해서는 중요하지만 신앙을 위하여 절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수요소가 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의 궁에서 생활하며 교육을 받았다. 바벨론이 펼쳤던 정책 중 하나가 속국에 있는 인재들을 데려다가 양육하고 교육해서 바벨론을 위한 일꾼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었던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끌려오게 되었지만 바벨론 왕궁에서 지내는 특혜를 얻었다. 왕궁에서 바벨론의 앞선 학문들을 배우며 음식은 왕의 진미를 먹었다. 끌려온 아이들은 비록 포로였지만 바벨론의 정책으로 이곳까지 끌려 왔기에 바벨론 왕궁에서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왕궁에서의 삶은 육신적으로는 편안했지만 포로 신세였기에 자유가 억압되고 개인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일용할 음식은 왕의 진미로 기름진 것이었고 최고의 식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벨론의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사용되었던 제물들이었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 음식 먹기를 거부했다. 포로 주제에 왕이 하사하는 물품에 대해서 거절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 음식을 거부한 것은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나 건강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앙적인 부분에서 자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데 비록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생활하지만 이방 신에게 제사한 제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단호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목숨이 다할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지만 신앙을 위하여 기름진 음식을 거부하는 모습이 진정한 절제라고 볼 수 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절제는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어야 하며 더 나아가 내가 하고 싶고 원하는 것들이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제해야 한다. 참된 절제는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참아야 한다.
앞에서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천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도 훨씬 더 많아진다.”고 했다. 우리에게 올바른 지식이 있다 해도 그 지식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무엇이 진정한 선이고 이웃에게 참다운 유익이 되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싫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는 교회에 유익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좋게 대한다고 나름대로 애썼는데 교회나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모습이 되거나 힘들게 했다면 상대를 향하여 나를 왜 몰라주느냐고 항변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한 선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 지식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절제가 요구된다. 절제하지 못하는 지식은 섣불리 상대방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게 만들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교만에 빠지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과한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너무 과한 것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허물이 없는 관계라고 해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되며 서로의 관계에서 예의를 지켜야 하며 자기감정이나 화를 자제해야 한다. 절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브레이크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차는 매우 위험한 차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고가 액셀로 인해서 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속도를 빨리 내지 못해서 사고가 나는 것이 아니라 브레이크가 잘 작동하지 않으면 제어가 안 되어 충돌사고가 나게 된다.
감정이 상해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를 내지 않고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때에 우리 입에서는 감정 섞인 말이 나오고 행동이 취해질 수밖에 없다. 감정은 순간적으로 반응하고 지나고 나서 이성은 우리를 후회하게 만든다. 우리의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이 말은 내 마음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갈 5:23절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 맨 마지막 열매로 절제를 언급하고 있다. 절제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나 내 뜻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으로 자제할 수 없을 지라도 성령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시고 다스려주시면 우리에게서는 절제의 열매가 맺혀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줄로 믿는다.
지식과 절제를 통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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