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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의 불길은 포장된 축복
2025-04-19 08:56:14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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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불길은 포장된 축복

벧전 4:12-13

250413종려주일낮설교

미국 뉴욕의 브룩클린에 윌리엄 리바인 이란 사람이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새에 네 번이나 강도를 만났고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다. 안 되겠다 싶어 고민하다가 강도가 흉기를 사용해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본인이 스스로 방탄조끼를 만들어서 입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의 상인들이 몰려와서 우리도 방탄조끼를 입고 싶은데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자작으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러면 자기들에게 만들어 팔라고 했고 그는 상인들로부터 방탄조끼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얼마나 잘 됐는지 아예 정육점을 정리하고 회사를 차렸다.

그 회사 이름이 바로 “Body Armor, International”입니다. 이 회사는 크게 성장하여 지금은 전 세계 40개 도시에 지사를 세우고 일약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육점 주인에서 세계적인 회사의 회장으로 변신한 윌리엄 리바인은 회장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도를 네 번 만난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강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칼을 들고 고기를 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이 참 희한하고 앞날을 알 수 없다. 당장은 시련을 겪고 있지만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나님은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에게 주실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물을 주시되 시련이란 포장지에 싸서 주신다. 큰 선물은 큰 포장지에 싸서 주신다.” 는 말이 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는 고난주간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여러 가지 만나는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볼 수 있기를 바란다.

 

1. 찾아오는 시련의 불길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라.

 

본문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성경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은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에게 평안을 묻고 평안한 삶을 원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평안을 원하지만 실제 세상에서의 삶의 환경은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이나 불안의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본문에서는 불시험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가 표준 새 번역에서는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로 되어 있다.

불시험이나 시련의 불길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오는 여러 가지 형태의 어려움이나 고난 같은 것들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를 만나게 될 때에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가 하는 생각과 아울러 함께 드는 생각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이다.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재수가 없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런 어려운 일이 발생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세상적인 생각으로 재수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늘 본문은 이상한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왜 어려운 일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당연히 여겨야 되는가? 어려운 고난이 우리에게는 나를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씀이다. 나를 가다듬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로 만들기 위함이다.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고난은 성도의 삶을 정화시킨다. 고난 속에서 성도는 신앙과 인격이 단련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에게도 때로는 불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고난의 시험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난 부분들이나 아직까지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을 때 우리를 연단하시기를 원하신다. 고난이 당하는 당시에는 고통이고 슬퍼 보이지만 연단이 지나고 난 뒤에는 보람과 큰 기쁨이 되는 줄 믿기 바란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는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41세 때 백혈병으로 쓰려졌다. 아무런 예고나 사전 증세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다. 그 때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는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다.

살다 보면 예고 없이 고난이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나 고난이 항상 불행은 아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깊은 계곡일수록 메아리는 크게 울린다. 진주는 고통 가운데 만들어지는 보석이다. 고난이 주어질 때에 이것이 나에게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확신했기에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전진해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은 고난 대신에 영광을 주시지 않고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주신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위대한 부활의 영광이 주어지는 줄 믿고 고난 가운데 원망 불평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 지고 묵묵히 주님을 끝까지 잘 따라 영광의 면류관 받아 누리기를 바란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문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은 무엇일까? 그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그 자체가 바로 고난이요 십자가이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의 고난을 아주 실제적이고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결과 율법의 심판으로 마땅히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아야 했는데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주님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해 받으신 십자가의 은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받을 수 있는 고난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다.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그의 제자들에게 남겨 놓으신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고난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제자를 구속하기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제자된 우리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교회를 위한 고난 받기를 싫어한다.

어떻든지 자기에게 유익이 되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힘들고 신경 써야 한다면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다.

물론 기독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니다. 억지로 무리해서 고생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을 맡아서 감당하고 여러 가지 봉사를 하고자 할 때에 저절로 잘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을 하던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정신적으로도 신경을 써야 하기에 그런 수고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주일 에배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하셨는데 그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다.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다음주 부활주일이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소망을 맛보는 귀한 시간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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