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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사랑하는 자녀
2025-05-17 09:04:55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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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사랑하는 자녀

6:1-3

250511주일낮설교

미국의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웹스터라는 곳에 안나자비스라는 여인이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더욱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파티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흰 카네이션을 달고 그 파티에 참석을 했다. 그녀는 그 이후 이 땅의 자녀들이 일 년 중 하루만이라도 어머니를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10만 달러의 어머니의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어머니날 제정을 국내외에 탄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7년 뒤 윌슨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시 어머니날 제정을 선포했고 미 의회는 1914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날로 처음 정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살아계신 어머니의 가슴에는 붉은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며 어머니의 은덕을 기렸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는 흰 카네이션을 자기의 가슴에 달고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며 이 날을 지켰다. 우리나라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58일을 어머니날로 정하였고 1973년부터는 어버이날로 개정하여 지키고 있다.

오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부모 공경은 사회 윤리적인 측면에서 지켜야 하는 당부의 말씀이 아니라 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자 명령이다. 부모 공경에 대해서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점점 사악해져가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딤후 3:2절에는 말세가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을 예언하면서 부모를 거역하는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를 말하면서 말세지말이라고 표현은 하는데 부모에 대해서 거역하는 모습이 많이 비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말세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아심을 갖는다. 그러나 말세지말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고 부모를 거역하는 시대이지만 우리의 부모들은 절대 자식들이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히려 못난 자식들을 옹호하신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 사회에서는 학대를 당하는 노인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통계의 수치를 제시하지 않아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세상 사람보다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나름대로 부모공경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몇 해 전 신문에 기고되었던 한 아버지의 고백이다. 스물아홉 살에 나는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나는 초조하게 무려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서른일곱 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걸 액자로 만들어서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방에 걸어놓고 쳐다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마흔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에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되었다. 쉰세 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 왔을 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며 행복해했다. 예순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멀찍이 서서 나이 든 후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자 부모의 마음이다. 그저 자나 깨나 부모는 자식 생각을 하며 지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살아간다.

모든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보내셨다. 하나님께는 등이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아기를 업어주셨고 가슴에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안아주셨다. 하나님께는 젖줄이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젖을 먹여 길러주셨고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돌보아 주셨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땅에서 계시해 주시는 분이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우리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은 어버이밖에 없다. 어버이의 용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줄로 믿는다.

시대적인 상황이 어떻게 변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는데 성경은 부모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고 있는가를 살피며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1. 부모 사랑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한다.

 

본문 1-2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 말씀은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믿음 안에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명령으로 믿음의 사람은 당연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공경은 무겁게 대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부모 공경을 어떻게 하는 것이 무겁게 대하는 것인가 할 때 반대로 생각하면 가볍게 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은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고 부모답지 않아도 부모를 공경해야 된다는 말이다.

 

1) 순종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를 기쁘게 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을 형식적으로 한다든지 마지못해 억지로 행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녀의 마음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잘해 드린다고 해도 마음이 없거나 마음이 들어있지 않는 것에는 부모가 기뻐하지 않는다.

돈으로 효를 살 수가 없지만 이 시대는 돈으로 효를 사려고 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상처를 받는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318만 명인데 그 가운데 놀랍게도 40%가 몸이 건강하면 불편하니까 자녀와 따로 살고 싶다고 했다. 이 통계는 오늘 우리 사회에 부모님들이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마음이 불편해 있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부모의 마음을 읽으면서 부모를 섬겨야 하는데 부모님의 마음을 읽는 것은 관심을 가지면 된다. 특히 홀로된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들은 지혜롭게 관찰하며 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제공해 드려도 부모님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효도는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중학생인 동식이는 점심때만 되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다. 동식이 도시락에는 돌이나 머리카락이 안 나올 때가 없다. 비록 눌려서 떡이 된 도시락이지만 동식이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친구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지 않고 선생님이 방문을 하려 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옆자리 친구가 과제물로 인해 동식이 집에 가게 되었는데 동식이의 엄마는 놀랍게도 맹인이었다. 그런데도 동식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에 돌아 와서는 엄마 오늘도 도시락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이 소식이 학교로 전해지고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부모 자식 간에 마음이 멀어지는 것보다 더 섭섭하고 외로운 것이 부모에게는 없다. 효도의 본질은 마음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잘 해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이 멀어지면 그것은 효도가 아니다. 오늘날 생활비는 꼭 보내드리면서도 마음에서 부모님을 지워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진정한 효도는 내 마음에서 항상 부모님을 떠나보내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효도는 내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에 대해서 거창한 효도의 원리를 적용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면 된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 따르면 된다. 효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근본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진정 부모를 부모 자리에 세워주고 부모를 공경만 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들의 효를 통해 기뻐할 수 있는 줄 믿는다.

 

2)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양하는 것이 아니다.

 

고사 성어 가운데 견마지양(犬馬之養)이란 말이 있다. 견마지양이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개나 말을 먹여 살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고사성어에 담긴 뜻을 살펴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먹여 살리기만 한다면 이는 개나 말을 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물질적인 봉양은 진정한 효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스승인 공자에게 효를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자 공자는 요즘 사람들의 효도란 부모를 음식으로만 잘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개나 말에 대해서도 모두 음식으로 잘 기르고 있다. 부모를 개나 말처럼 먹여 살릴 줄만 알고 공경을 모른다면 짐승을 먹여 살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한데서 유래했다.

 

신라시대에 지은이라는 효녀가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지은이는 어머니를 봉양하느라고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집이 가난하여 삯일도 하고 얻어다가 먹기도 했지만 오래 견딜 수가 없어서 부자 집에 여종으로 몸을 팔아 쌀 10가마니를 받았다. 낮에는 그 집에 가서 종일 일하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왔다. 이렇게 3-4 일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다. “그 전에는 좋지 못한 밥이지만 맛이 있더니 요새는 음식은 좋으나 맛이 없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니 이게 웬일이냐?” 딸이 사실대로 말했다. 어머니는 통곡하면서 내 너를 종으로 팔아 이 목숨을 연명하며 살다니 내가 어서 죽어야 되겠구나.”하는 것이었다. 딸은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여 서로 안고 우니 우는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때 마침 화랑 효종랑(孝宗郞)이 포석정에 놀러 왔다가 이 사실을 알고 감격하여 부모에게 말했다. 효종랑의 부모는 조 백가마니와 의복을 보내고 종으로 산 사람에게 돈을 주어 속량하여 풀어 주었다. 효종랑의 부하들이 천명이 넘는데 그들도 조 한 섬씩을 보내고 진성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벼 오백 석을 보내고 집을 지어주고 또 곡식이 많으므로 군사를 보내어 파수를 서게 하고 어버이를 효로써 받들어 섬긴다 해서 그 동네를 효양방(孝養坊)이란 이름을 지어 표창했다.

 

부모를 부양하는 것과 공경은 다르다. 우리는 부모부양을 부모 공경이라고 착각한다. 잠자리와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제공해 드리면 부모 공경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육체적으로는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드리는 부양은 하는데 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있는 자녀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하는 삶이기에 우리 성도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높은 수준의 도덕적인 삶을 살아 칭찬받는 성도가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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