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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짐을 나누어 져라
2025-12-06 08:44:54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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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짐을 나누어 져라

6:1-5

251130주일낮설교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 싱(Sundar Singh)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한 사람이 히말라야산맥의 한 산을 넘어가던 중 추위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지금 내가 나를 지키기도 힘든데 어떻게 저 사람까지 도와주겠나 하고 생각하며 그대로 지나쳤다그런데 바로 그 뒤에 따라오던 선다 싱은 그 사람을 발견했을 때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지체 없이 자기 등에 업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업었으니 아주 힘겹게 걷다가 한참 걸려 간신히 산을 넘어가 보니 또 다른 사람이 눈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이미 죽어 있었는데 그 죽은 사람은 놀랍게도 몇 시간 전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그는 눈보라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쓰러져 죽고 말았지만 선다 싱은 죽어 가던 사람을 들쳐 업고 가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땀을 뻘뻘 흘리며 살 수 있었다이것을 통하여 선다 상은 바로 그때 남을 살리는 것이 곧 나를 살리는 길이라는 너무나도 소중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다. 마지막 지푸라기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는 말이 있다. 강인한 수컷 낙타는 300~450의 짐을 지고도 20~30의 사막 길을 거뜬히 지나간다고 한다. 그런 낙타에게 깃털 하나가 무슨 영향을 미칠까 싶지만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 깃털 하나의 무게로 인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짐을 지고 힘겹게 살아간다. 그러다 옆 사람의 한마디 독설이나 암 투병 후 재발 소식이나 카드 값 독촉 전화 한 통이나 믿었던 친구의 배신 등이 마지막 짐이 돼 결국 무너지게 된다. 우리의 차가운 눈빛이나 말 한마디가 상대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나 눈 빛 하나가 힘을 잃고 상심해 있는 마음에 큰 위로와 소망으로 다가오게 해야 한다.

물론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주님께 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나 먼저 주님의 제자 된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짐을 나누어지는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다룰 말씀의 첫 부분인 갈 6:1절의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이것은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를 때 나타나는 공동체의 아픈 단면을 보여 준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어서 성령을 따라 사는 영적인 사람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과 책임이 따르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특별히 본문 말씀은 성령을 따라 사는 신령한 성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서로를 세워가며 또한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성실하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성도나 교회를 향하여 어떤 신앙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성도들의 짐을 서로 지라.

 

본문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남부 갈라디아 지역에 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 등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갈라디아는 도시가 아니라 지역 이름이고 그곳에 네 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의 새 신자들은 교회에 은근히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고 있었다그래서 바울은 주후 48년경 갈라디아 교회에 맨 처음 편지를 보내게 된다. 

1:6-7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은 여러 가지 죄에 빠지게 되었고 5장을 통해 바울은 그들의 죄악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5:19-21절 상반 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교인들에 대해서 바울은 본문 1절에서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을 향한 해결책을 말하고 있다.  본문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한마디로 말해서 서로 짐을 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짐을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우리 주변에 있는 성도가 잘못을 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죄하고 비난하며 손가락질한다잘못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판단하며 비난하는 것이 자기의 의로운 행동이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최선의 방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극적이고 초보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권면하고 있는가?

본문 1절에서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권하는데 온유한 심령은 신령한 자가 소유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신령한자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를 말하는 것인데 이 말을 종합해 보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령한 자는 다른 성도들의 범죄 한 일이 드러날 때에 그것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정죄하기 보다는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주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의를 가지고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정죄하고 비난하거나 크게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 되었 다기 보다는 미숙한 사람의 처신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숙한 사람은 그런 잘못된 것을 보았을 때 인간적인 분노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는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한 사람의 죄에 대해서 동조하거나 그냥 넘어가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연약함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회복을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내 편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연약하여 실수하거나 넘어질 수 있다. 그럴 때 갖는 마음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저런 사람은 그냥 나두면 안되는데 라는 여러 가지 많은 말들을 할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인간적인 대처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무조건 정죄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나도 저런 실수나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은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고 완전한가하면 그렇지 못하다. 부저소성저 라는 한자어가 있는데 이는 가마솥이 노구솥보고 검다고 비웃는다는 말이라는 것으로 성경에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 한다. 일반적으로 하는 말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서로 짐을 같이 진다는 것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상대를 이해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상대를 대할 때 교회는 세상과 달리 따뜻한 온기가 넘치는 귀한 사랑의 도가니가 될 줄로 믿는다.

 

2. 자기 짐을 지라.

 

본문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표준 새 번역 성경에 보면 이렇다. 6:5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 가운데 짐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는데 2절에서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고 본문 5절에서도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2절의 짐은 바레 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5절의 짐이라는 단어는 포르티온이라는 단어로 표기되어 있다. 2절의 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말하는데 이렇게 무거운 짐은 서로 져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5절의 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군인이 자기 군장을 지고 가듯 각 개인이 마땅히 져야 할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이나 분깃을 말한다. 그러므로 2절과 5절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지체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은 함께 나누어 져야 하지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짐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 즉 자신의 몫의 짐은 각자가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사명을 이행했는가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누가 대신 져 줄 수 없다.

가정을 생각해 볼 때 자녀들이 어리면 가만히 있는 것이 부모를 도와주는 것이지만 아이들이 점차 자라면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른다. 그러다가 장성하고 부모가 힘을 잃어 가면 그 역할들을 자녀들이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가정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세례 받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 봉사하려고 할 때 기본은 세례 받아야 한다. 세례 받은 사람을 초 신자라고 할 수 있지만 점점 시간이 더해감에 따라서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면 그에 합당한 역할들을 감당해야 한다.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힘쓰는 것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 교회의 할 일에 대해서도 자기의 역할과 자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일에 뒷짐 지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안 해도 다른 사람이 다 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 교회가 내가 다니는 교회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 교회라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일은 전문가들이 모여서 하는 곳이 아니기에 믿음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다 감당할 수 있는 줄 믿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꾼들이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일꾼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의 참여가 교회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기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 재정적인 부분도 역시 마찬가지다. 헌금에 있어서도 세례교인들은 자기 수입의 십일조 헌금을 감당해야 하고 관심 있고 해당되는 기관의 헌금이나 각종 교회 일에 대한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바라보며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부족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일은 인간의 판단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감당해야 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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