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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플렛폼(18) 믿음은 가치 있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2024-07-20 09:58:31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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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플랫폼(18)

믿음은 가치 있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11:24-26

240714주일낮설교

찬송가 488장의 이 몸의 소망 무언가는 에드워드 모트가 작사한 곡이다. 모트는 영국의 찬송가 작사가이면서 목사였지만 본래는 금고제작자였다. 그는 열등의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일을 해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삶이 늘 무의미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교회 옆을 지나다가 불현듯 들어가고 싶은 생각에 불쑥 들어가서 말씀을 듣고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충만해졌고 이제는 일을 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 후로 이런 고백을 했다.

내 망치 소리가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아난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일하는 게 즐거워지니까 만사가 잘 풀려 마침내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고 후에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 교회를 건축해서 봉헌하기도 했다. 또 목사와 찬송가 작사자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한번은 그가 언덕 위에 앉아 지난 인생을 회고하던 중 자신이 앉아 있는 바위 돌을 보면서 반석이신 주님이 자신을 떠받쳐 주시고 계시는 것을 깨닫고 즉석에서 찬송시를 썼는데 그게 바로 이 몸의 소망 무언가 라는 찬송이다.

한 절 한 절 가사가 은혜롭지만 후렴이 특히 은혜롭다. 우리말 가사에는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로 되어 있는데 원본 영문 가사를 보면 그 의미가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On Christ, the solid Rock, I st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예수님만이 굳건한 반석이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모두 가라앉는 모래와 같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기의 소망으로 삼고 나가길 원하며 그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고 우리의 삶에 만족함으로 채워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찬송의 가사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 우리를 실망시키는 가라앉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견고하고 굳건한 반석이 되시는 줄 믿기 바란다. 오늘 본문의 모세의 믿음도 세상적인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고 더 좋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모세의 생애는 120년이었고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40년은 애굽 바로궁에서의 생활이고 그후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의 훈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40년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삶이었다. 사람들은 40년 준비해서 80년을 일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있어서 80년을 훈련시키신 뒤에 40년을 사용하신다. 80년을 쓰임 받던 40년을 쓰임 받던 중요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모세를 가리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고 또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모세는 전무후무한 이스라엘의 선지지 였다고 칭함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모세에 대해서 히 11:24-29절까지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먼저 부름 받아 쓰임받기 전인 80세까지의 모세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2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1.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 보다는 더 가치 있고 귀한 일을 선택했다.

본문 24-25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난지 석 달 동안은 부모의 슬하에서 숨겨진 가운데 양육을 받다가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결국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 강에 띄어 보내개 되고 결국 바로의 딸인 공주의 눈에 띄게 된다. 공주는 그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임을 알고 데려다가 양자로 입적하여 키우게 되고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궁에서 모든 학술을 배우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모세는 당시 애굽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었던 유대인으로서 순식간에 공주의 양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것은 모세의 삶에 최고의 순간이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 물론 신분의 차이로 왕이 될 수 없었겠지만 그대로 지냈으면 왕자중의 한명으로 부족함이 없는 한 평생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이 보다 더 매력적인 일이 있어야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애굽보다는 적어도 다른 나라의 왕으로 와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면 애굽의 여러 왕자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눈치 보며 사느니 적더라도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내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처음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다. 계속 거부하자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다. 그리고는 결국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억지 순종 한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고 놀라운 역사를 행했다. 자발적인 순종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잘되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줄 믿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고 합당한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 길은 우리 눈에 힘들고 거친 길 같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물러나고 싶어 뒤로 빼지만 순종하면 결국에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이루어질 줄 믿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어린아이들은 철이 없어서 사리를 잘 분별하지 못한다. 어린아이 손에 과자 봉지가 들려 있을 때 옆에 엄마가 아이에게 할아버지에게 과자 하나드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는 맛있는 과자를 움켜쥐고 등 뒤로 숨긴다. 할아버지가 오만 원 권 지폐를 흔들며 과자 하나를 달라고 말하지만 어린 손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옆에서 보고 있는 엄마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이에게 재촉하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다. 이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좋아 보일지라도 우리의 궁극적인 복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붙들었던 세상 것을 놓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는 세상 것들은 우리를 점점 바닥으로 침몰시키는 바다 속의 모래 같은 것임을 인식하고 오직 반석 되시는 주님만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붙들고 있던 세상 것에 대해서 손을 펴고 더 크고 중한 하나님의 영광과 복을 붙잡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본문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본문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는 말은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 과 같은 말로 중복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해석해서 의미를 부여해서 쓰고 있다.

모세에게 있어서 육신적으로는 애굽 궁에서 왕자로서 모든 육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가운데 편안히 지내다가 인생을 마감 짓는 것이 훨씬 나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고생과 많은 수고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모세도 알았다. 그렇지만 육신의 편함을 추구하기보다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은 결국 자기에게 주실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수원의 광교 호수공원 말고 광교 저수지 길이 있다. 저수지 입구에서 저수지 끝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저수지를 따라 조성해 놓은 데크 길을 따라 걸으면 편안하게 갈 수 있다. 그러나 왼쪽으로 돌아가면 산을 따라 형성된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공존하고 있는 조금 힘든 길이다. 편안히 봄에 피는 벚꽃이나 보면서 산책하려면 데크 길을 선택해야겠지만 운동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체중의 감량을 위해서는 땀나고 힘들어도 왼쪽 산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당장에는 힘들어도 결과적으로는 육신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이 땅에 살면서 육신을 따라 눈에 보이는 만족과 편함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고후 4:17-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소망하는 것은 오로지 미래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의 영원한 상급은 미래적인 것이고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삶에는 아무 유익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영원한 복락과 행복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지만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의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보상되어지는 은혜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소용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벧후 1: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에게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주셨다고 했다. 이것은 내세에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해당되는 것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즉 현세에 임하는 하나님의 상급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일본의 크리스챤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가 이런 표현을 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은 살 수 없다.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다. 아름다운 옷은 살 수 있어도 아름다움은 살 수 없다.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다.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 수 없다. 쾌락은 살 수 있지만 평안은 살 수 없다. 사치품은 살 수 있어도 문화는 살 수 없다. 오락은 살 수 있지만 기쁨은 살 수 없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침대나 음식이나 옷이나 집이나 약 같은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도 이런 것은 다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뒤에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다.

 

어느 것이 우리 삶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인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다. 모세는 왕궁이 아니라 광야에서도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광야의 고통이 주어지는 상황이지만 건강했고 평안했고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인생은 물에서 벗어난 물고기처럼 방황하며 헐떡일 수밖에 없다.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고향은 우리의 나온바 하나님 나라임을 확신하여 본향을 사모하되 하나님의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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