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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14)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2025-10-18 08:40:00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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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14)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3:4-11

251012주일낮설교

주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서로 축복하기 바란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치관이 전도 되었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 보다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좋은 나무가 되면 자연히 그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래서 영어로 Doing 보다 Being이 먼저요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이 말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먼저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가 우선적이고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얼마나 소유했느냐 하는 것 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쓰는 법을 알지 못하면 소유가 많을수록 더 불행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소유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썼는가를 평가하신다. 한번 왔다가는 인생길에 세상의 소유에만 집착하여 거기에만 모든 것을 허비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면 얼마나 허무하고 어리석은 삶이 되겠는가?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영원한 천국을 알고 믿고 있기에 일시적인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할 줄 믿는다.

 

우리 성도들 중에는 봉사 하는데 누가 알아주지 않고 몸이 아파서 힘이 들지만 계속해서 봉사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런 몸을 가지고서 고생을 하느냐고 하면서 그 일을 하면 떡이 생기냐 밥이 생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물론 떡과 밥이 생기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일이 좋고 귀해서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내게 돈아 생기기 않아도 그 일을 놓을 수 없는 것은 그 일을 하는 것이 좋고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돈이나 명예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들어내는 것에 관계없이 그 일에 열심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줄 믿는다.

본문의 사도 바울도 자랑거리가 많았고 나름대로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서 가치 있다고 여기며 살았다. 본문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름대로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어깨에 힘주고 살았지만 자기가 소유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 하고는 그동안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을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우선순위를 부여하여 지혜로운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1.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것이다.

 

본문 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예수님을 알기 전의 바울에게는 자랑할 거리가 많았다. 그것에 대해서 5-6절에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바리새인이고 유대교인으로의 열심이 넘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고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언급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조건들은 사실 귀한 것들이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지금 말로 한다면 모태신앙이라는 말이다. 베냐민 지파라는 것은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다윗에 이어 두 번째 아들로 형성된 지파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기에 왕족이었고 다윗왕조 시절 다윗에 대해 한 번도 배반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 내에 속해 있었고 포로기 때에도 유다지파와 더불어 믿음을 끝까지 지킨 지파였다. 사사기 시대에 군대 요직들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고 에스더서에 나오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는데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명문 지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율법에 능통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 반열에 위치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독교회를 핍박한 정도로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잘 아는 대로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서를 받아서 그 일을 시행했던 사람이었다. 그 민족 가운데 바울은 내놓을 것이 있는 자랑스러운 유대인이라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들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지나다가 갑자기 마음의 심적 변화를 일으킨다.

본문 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이 말은 자기가 자랑거리로 삼던 것에 대해서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8절에서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객관화된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고 교제하심으로써 알게 되는 인격적인 지식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 때문에 세속의 가치에 빠져 있었던 성공신화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가는 핵심가치를 붙잡았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형식적이고 반복적인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은 종교 행위로 신앙을 대체 할 수 없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믿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 믿음은 가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줄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교회를 몇 십 년 다니고 있는데 나는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교회를 다니다보니 교인이라고 착각하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고 나를 도우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생활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고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라는 착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셨기에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우리의 인생길에 위로 자가 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자동적으로 형통한 길이 열리고 모든 삶에 있어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의 요술 램프에 불과할 뿐이다.

신앙의 핵심가치는 하나님을 얼마나 인격적으로 알고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흔들릴 수 있다. 사탄은 우리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 믿어서 부자 됐냐? 건강하냐? 자식들은 복 받았냐? 하는 소리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그러한 음성에 결국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 흔들려 버린다. 평생 예수 믿고 열심히 살았는데 이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신앙의 핵심가치를 붙들고 살면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거나 뺏어갈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에 육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이 있지만 육체적인 것은 썩어질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물론 육체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썩어질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거룩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내하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낙심과 절망이 되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도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과 말씀의 결과는 이 세상의 결과로 평가될 수 없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결정됨을 믿기 바란다.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었는가를 늘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적인 것을 가치기준으로 삼기 보다는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진정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복된 삶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바란다.

 

2. 신앙의 우선 가치는 복음의 능력을 붙잡는 것이다.

 

본문 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자기 자랑이나 의가 가득했지만 자신의 의로 여겼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모래 탑처럼 무너져 버렸다. 9장에 보면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바울 아직 개명을 하기전 이름인 사울에게 강한 빛 가운데서 들리는 음성이 있었다. 그 소리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사울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은 바울에게 있어서 평생 잊지 못할 엄청난 사건으로 바울의 삶의 방향을 예기치 못한 정반대 방향으로 전환 시켰다. 단지 방향만 전환 시킨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목적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며 오직 부활의 주님을 자기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표준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주된 핵심은 내가 살아서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삶을 살아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이 되어야 하는 줄 믿기 바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철저하게 죽여야 한다. 죽어야 부활이 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안 죽는다. 죽는 것 같아도 죽는 시늉만 내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다. 내 자아가 살아있고 내 욕심이 살아있고 내가 살아서 자꾸 나를 드러내려고 한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다 죽이고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새롭게 부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아 헛된 것들을 내려놓고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울은 진정한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바로 깨닫고 자기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는데 우리는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최대의 자랑거리인양 그것을 내세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깨달아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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