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쁨의 플랫폼(5)
삶의 명확한 이유가 있는가?
빌 1:19-21절
주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옆 사람에게 축복하기 바란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는 의사요 신학자와 음악가로 의료선교를 통해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13년부터 1965년 임종할 때까지 가봉의 랑베레네에서 흑인들과 함께 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그가 이렇게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었던 것은 비전 때문이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교회 주변의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부들이었다. 하루는 하굣길에 덩치 큰 아이가 그에게 시비를 걸어 왔다. 싸움이 붙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슈바이처가 그 아이를 땅바닥에 깔아뭉개고 주먹으로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 그 아이가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야, 나도 너처럼 고기를 먹으면 네까짓 것 문제없어!” 그 소리를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그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고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며 비전을 갖게 되었다. 30세에 의학을 공부한 후 아프리카에 가리라 결단했고 마침내 그는 신학박사, 음악박사, 의학박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 흑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인생은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 꿈을 꾸는 인생은 주저앉지 않지만 꿈을 잃은 존재는 인생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꿈을 꾸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이 있다. 리처드 바크가 쓴 것으로 해안가를 빙빙 돌며 다른 갈매기들과 함께 먹이를 구하던 조너선 리빙스턴이라는 갈매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의 꿈은 ‘먹는 것’에서 ‘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초월적 속도로 나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높이 날고자 하는 그의 꿈 앞에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자신의 연약함이나 다른 갈매기의 빈정거림 그리고 힘들고 낯선 환경 등이었다. 그렇지만 리빙스턴은 장애물이 아니라 목표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침내 꿈을 이뤘고 다른 갈매기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갈매기의 꿈의 주제곡 ‘되다(Be)’에서 닐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면 유일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만들어 줄 거예요.” 소설 속의 이야기이지만 갈매기에게도 높이 날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했다면 우리의 환경이나 나이가 문제는 아니다. 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꿈조차 꾸지 못하는 연약함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꿈꾸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꿈꾸는 인생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는 청년이나 청소년들에게나 필요하지 우리가 나이가 얼만데 우리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의 허황된 개꿈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꿈과 비전을 세우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꿈과 비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줄 믿기 바란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답답함에 휩싸여있었지만 결코 소망을 잃지 않았다. 꿈꿀 수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주눅 들거나 좌절하지 않고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1. 꿈꾸는 자는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본문 19절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이것이라는 표현은 지금 바울이 처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지난주에 말씀 드렸듯이 지금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있다. 바울은 육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18절 하반 절에서 고백하듯이 기뻐하며 기뻐하고 있는 이유가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다.
18절의 기뻐하는 이유가 오늘 19절 말씀 속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자기에게도 구원을 허락하실 것에 대한 확신과 기쁨이 있었다.
여기서 구원은 말할 때 바울은 이미 중생함을 얻은 사람으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왜 구원을 언급하고 있는가? 구원에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멀리있는 소망으로 마지막 주 앞에 섰을 때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구원을 말한다. 바울이 중생했지만 중생이후의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마지막 영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딤후 4: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 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갈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행한 모든 것에 대해서 칭찬하시면서 면류관을 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믿음으로 평생을 살았다.
또 하나는 가까운 미래의 소망으로 감옥에서 풀려나는 구원을 말한다. 성도 여러분이 나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나를 돕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곧 내가 풀려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대로 감옥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란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자신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 이다. 비록 지금은 넘어져 있고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을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 절대로 나에게 나쁜 것을 행하시거나 이렇게 나를 버리실 분이 아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고쳐 주시고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신다. 하나님은 나의 삶을 승리로 인도해 주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나의 삶에 역사하심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한다. 내 배우자를 믿는 믿음이 있지만 말을 안 하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일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불안 해 하며 궁금해 할 것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 살아오면서 내 배우자는 내가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때로는 궁금함을 가지기도 한다. 같은 수준의 사람이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고 때로는 모를 때도 있다.
하물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다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것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말고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불안한 생각이 든다 해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믿음의 고백으로 기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습3:16-17절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고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비전의 사람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한다.
본문 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9절에서는 빌립보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감옥에서 풀려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20절에 보면 가지고 있는 첫 번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풀려날 것을 확신하지만 혹 감옥에서 풀려나지 않을 지라도 그것 때문에 자기가 비굴하게 타협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채 지내다 보면 심신이 약해져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불의한 재판관과 타협하는 약한 모습을 보일까 염려하여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자기에게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크게 높임 받으시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전부였다. 바울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성공신화에 빠져서 세상의 성공만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며 주께 영광 돌리기를 자기 인생의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 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신앙의 중심축을 옮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삶을 살아왔다고 하면 예수 믿고 난 뒤로는 인생의 주권을 나 자신에게서 예수님께로 넘겨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은 이제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주님을 앞세우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드리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 진정 하나님께서 쓰시는 인생이 되는 줄 믿기 바란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웠고 소수민족이었지만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적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모세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셨다. 자기의 가진 지식이나 존귀함의 자리에 앉아 있던 모세에게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 민을 의지하며 높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살인자라는 죄수의 신분이 되게 하시며 더 이상 바로의 궁에 있지 못하고 떠나게 하셨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나게 하시는 가운데 바로의 궁에서 배운 모든 학문이 아무 쓸모가 없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길에서 지나게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로서의 삶을 위해 준비시키셨다.
결국 하나님께서 80이 된 모세를 부르실 때 자신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아닌 연악한 인생임을 바라보게 하셨다. 연약한 모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연약한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가게 하신다.
연약한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라도 나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승리자가 되는 줄 믿기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나 자신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그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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