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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4) 환경을 초월하여 누리는 기쁨
2025-07-29 10:07:11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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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4)

환경을 초월하여 누리는 기쁨

1:12-18

250727주일낮설교

주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서로 축복하기 바란다.

어떤 부부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다가 옆집 여자가 빨래 너는 것을 보던 아내가 말을 했다. “아이고 빨래가 저게 뭐야. 빨래할 줄 모르네. 세제를 좀 좋은 것으로 쓰지 그래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남편은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이웃집 여자가 빨래를 널 때마다 아내는 옆집 여자가 빨래를 못한다며 핀잔을 늘어놓았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옆집 빨래 줄에 깨끗하게 세탁된 빨래가 널린 것을 보고 아내가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옆집 여자가 오늘은 빨래를 제대로 했네요. 누가 가르쳐 주었나?” 그때 남편이 말했다. “, 오늘 아침 일찍 내가 우리 집 창문을 닦았어.” 지금까지는 자기 집 창문을 닦지 않아 지저분한 유리문을 통하여 남의 집 빨래를 보니까 더럽게 보인 것이었다. 사람의 관점 즉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본문의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보내는 편지글의 내용 중에서도 변화된 관점의 중요성을 살필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이 신앙생활하기가 힘들었고 여러 가지 핍박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앞장서서 복음 전하는 바울에게는 더한 고통과 어려움이 주어졌다. 바울이 당한 형편과 상황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복음전도 사역에 매진 할 수 있었는가 하고 놀랄 수밖에 없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환경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형편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떠한 환경에도 처할 자세가 되어있었고 오히려 만족해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바울이 처한 환경이 힘들고 어렵지만 바울은 자기 형편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육신의 눈을 통해 인식하는 대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상황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그 관점으로 우리 앞에 놓인 상황과 형편을 바라보면서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1. 풀무 불 연단 속으로 던져진 바울이다.

 

본문 12절 상반 절 형제들아 내가 당한일이

 

바울은 원래 서바나를 가기를 원했지만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고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로마의 수도도 방문하기를 원했다. 바울에게 로마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고 해도 자유로운 몸으로 로마에 가서 이미 존재해 있는 교회들도 돌아보고 또 그곳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복음전하는 일 때문에 붙잡히게 되었고 그때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밝힌다. 로마 시민권자는 속국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원치 않게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오게 되었지만 재판받고 곧 풀려나서 자유롭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옥에 있는 시간이 이 년이 다 되어가지만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었고 자연히 불안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불편한 속마음이 은연중 묻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울의 고백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에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절대적인 사명이었다. 그는 어디에 가든지 또는 언제든지 복음을 전했고 복음전도에 올인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손발이 묶여 있는 것처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사람들을 연단하신다.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성경에 연단이나 징계 그리고 훈련이나 시련은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징계가 신앙의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쇠를 연단할 때도 뜨거운 풀무 불에 넣었다가 두드리고 찬 물에 넣는 것을 계속 반복한다.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연단도 당시에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고 어렵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다. 요셉을 조심스럽게 온실 안에서 자라게 하시다가 어느 날 순간적으로 애굽의 총리로 삼으신 것이 아니었다. 형들의 시기로 미디안 상인의 손에 팔리게 되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게 하셨다가 거기에서 그냥 잘 지내게 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에 요셉의 삶의 고난이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계속 머물게 하셨으면 그 집의 가정 총무로 인생의 막을 내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으셨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행하시는데 초석이 되게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옥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결국 바로를 만나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사용하시기를 원하셨고 그 과정이 죄수의 몸이었고 이 년이라는 긴 시간을 로마 감옥에 머물게 하셨다. 그러니까 요셉이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것이나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옥살이를 이 년 이상 한 것이나 다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때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수렁 속에 던져지는 상황을 만날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그 상황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나?

 

2. 관점을 바꾸면 주어지는 상황에 관계없이 즐거움과 만족함을 누리게 된다.

 

본문 12절 하반 절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기가 처한 환경과 형편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거나 절망에 빠져 있지 않았다. 바울이 처한 환경과 형편은 원망과 불평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바울은 왜 불평대신 기뻐한다고 고백했는가?

바울은 옥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감옥살이가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가택연금의 수준이었다. 그의 출입에 있어서는 매여 있었지만 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경비를 24시간 서지만 6시간씩 4교대로 군인들이 바뀌었다. 로마의 군인들은 바울이 자유로운 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대상이었지만 오히려 죄수의 신분으로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자기가 당한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 바울이 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다 나서서 바울 대신 자기들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열심을 내고 있었다.

 

본문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그 가운데는 바울이 못하고 있는 전도를 우리라도 하자하는 선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바울이 전도를 못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전도해서 우리 이름을 좀 내자 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다. 본문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이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자기가 처한 환경과 형편을 육신적인 생각이나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먼저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기 앞에 놓인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게 된다. 어려운 환경을 바라볼 때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이것을 어떻게 하나하는 불안과 아울러 걱정과 근심이 밀려온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자기 육신이 감옥에 매여 있다는 생각에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절망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복음 전파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다 행복과 평안한 삶을 원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어려움과 고난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환경이 바뀌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기뻐할 새도 없이 어느 순간 또 다른 문제가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마치 산 넘어 산 이고 예기치 못한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기도하는데 상황이 바뀌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바뀌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칠판에 그림을 하나 그렸다. 높은 울타리를 쳐 놓고 입구에 곰이라는 글자를 썼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울타리 안에 있다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어린이가 높은 울타리를 넘을 수도 없고 입구에 곰이 있어서 못 나가니까 학생들은 나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울타리는 높고 입구는 곰이 버티고 있기에 처음부터 안 된다고 포기한다. 그러나 무조건 안 된다고 포기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곰을 뒤집으면 문이라는 글자가 된다. 곰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면 곰이 문이 될 수 있다. 선생은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그림을 그리고 물어 본 것이다.

세상적인 사람은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지만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카메라의 렌즈 가운데 멀리 있는 것을 찍을 때는 줌렌즈를 사용해야 하고 넓은 풍경이나 사물을 찍으려고 한다면 광각렌즈를 사용해야 한다. 렌즈에 따라서 보이는 사물이나 경치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마치 카메라의 렌즈를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렌즈에 따라서 앞에 있는 물체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앞에 있는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같은 상황에서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면 상황이 달라 보일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평탄한 길을 걸었다든지 문제없는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어떠한 환경이든지 육신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신앙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며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다.

바울도 자기에게 주어지는 육신적인 상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자기 현실을 신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하며 기뻐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육신적인 생각에 치우쳐 원망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신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낙심과 절망의 순간이 다가와도 넘어지거나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변화된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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