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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3)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
2025-07-22 14:51:39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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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3)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

1:9-11

250720주일낮설교

옆 사람에게 주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서로 축복하기 바란다.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웰스(H. G. Wells)가 쓴 단편 소설 가운데 <성직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책에는 한 성직자가 매일 저녁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에 모두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이 성직자를 보고 칭찬을 했고 본받을 성직자라고 존경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성직자가 기도하다가 그만 죽었다. 알고 보니 그날도 똑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그날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응답을 하셨다. “아들아! 내가 듣고 있다.” 그러자 성직자는 그 소리에 그만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 이지만 매일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지만 정작 믿지는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이런 글을 썼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두 개의 큰 축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말씀과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먼저 기도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면서 시작해 보고자 한다. 기도에 대한 이론적인 많은 내용들을 다룰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기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기도는 모든 종교에 다 있는데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우리 기독교의 기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른 종교에서의 기도는 신들을 향해 자기의 소원을 빌면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빌고 기도하는 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도 잘 모르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저 정성만 들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기도 역시 우리의 필요라든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방 종교의 기도나 우리의 기도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는 기도와 간구로 구분하고 있다.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간구라고 말한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너희 모든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라.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에는 이방 종교에서 하듯이 우리의 염려거리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기도하는 간구도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에는 간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도 있다고 말씀한다. 이때의 기도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고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인가를 물으며 그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지는 상황 하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물으며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 하고 싶은 말만 주저리 주저리 아뢰고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며 기도를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통하여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내게 당면한 문제가 없다 해도 나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 물으며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헤아려보아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물론 이방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기뿐 아니라 자녀와 가족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가족이나 친척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무엇을 위해서 기도 하고 있는가를 살피며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1. 성숙한 사랑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다른 번역 성경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기의 출옥을 위한 기도부탁이 아니라 오히려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며 염려하는 진정한 사랑꾼 바울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삶에 문제가 없고 평안할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나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지금 자기 코가 석자인 상황이지만 자기의 형편을 탓하며 다른 사람에게 불평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염려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져서 성숙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교회는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줄 믿는다.

물질의 풍성함이나 교인들의 숫자의 풍성함보다는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칭송받는 교회가 되는 줄 믿기 바란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랑이 식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사랑으로 결합되어야 할 결혼도 우선순위가 사랑이 아니라 물질로 바뀌어지면서 사랑은 옛 시대의 유물처럼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현상이 사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교회 안에서도 세상을 따라가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교회가 사랑을 잊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7개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씀한다.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늘의 시대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상은 사랑이 점점 희귀해져가고 있다. 세상의 상황은 이렇게 흘러간다고 해도 우리 교회는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인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풍성한 사랑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본문에는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라고 말씀한다. 지식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고 총명은 분별력을 가지라는 말이다.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사랑을 분별력있게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고 닮아 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세상이나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성도들인 줄 믿기 바란다. 나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성도만이 아니라 나한테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도 내가 사랑해야 되는 대상인줄 믿기 바란다. 편협한 마음을 열어주옵소서. 닫혀있는 상대에게 열려진 마음으로 다가가게 하옵소서. 마음에 응어리가 있어 대면하기 껄끄러운 상대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직까지 미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라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린아이처럼 자기에게 잘해주거나 친절을 베푸는 사람만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품고 나가는 귀한 심령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의의 열매를 맺히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본문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 성도로서 마땅히 맺혀야 할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의라고 단어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올바름이나 공정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라는 의미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올바름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빌립보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의 열매가 가득히 맺혀야 함을 말한다.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택정함을 입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의인이 되었다고 인정받는 칭의를 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성도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의로운 삶의 모습인 성화의 증거를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죄 가운데서 구원받아 의인 되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의 자세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한다.

성도는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면에서 깨끗하고 불의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도들의 삶은 세상적인 잣대로 우리의 삶을 평가하면서 의로우냐 불의하냐를 판단하기 보다는 세상적인 기준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세워진 세상 기준을 어떻게 하면 피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내가 그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쉴 때가 많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일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생각하여 살인죄는 나하고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다른 사람에게 라가라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라가라하는 말은 유대인의 욕설로 비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멍청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고 미련한 놈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욕설을 내 뱉음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미련하고 멍청이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해서 스스로 자학하게 만든다. 내가 그런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 멍청이인가 하는 자책감에 빠지게 하면 그것도 그 사람의 마음에 살인을 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입술의 말이나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족 시켰으며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가를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말로라도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 주님 앞에 쌓이게 되고 주님의 평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나에게 더욱 풍성하고도 성숙한 사랑을 주셔서 주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날마다의 삶에서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혀나가게 하옵소서.

그런 우리들의 삶이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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