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설교    >    설교

설교

본받고 싶은 교회(11) 마지막을 소망하는 믿음의 자세
2026-04-25 09:08:50
사무실1
조회수   10

본받고 싶은 교회(11)

마지막을 소망하는 믿음의 자세

살전 4:13-18

260419주일낮설교

태아가 출생하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과학적으로는 호흡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엄마 배 속에 태아는 탯줄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기에 태아의 폐는 액체로 가득 차 있어서 사용되지 않는 상태다. 그러나 탯줄이 끊기는 순간 아기는 스스로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울음을 통하여 폐 안의 액체를 뱉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출생하는 아기의 울음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경험에서 나온 말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처음 가는 나라에로의 여행에 있어서 가이더가 동반하는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단체여행은 그나마 안심이 된다. 그러나 가족끼리 가는 자유여행이라고 하면 나이 든 부모의 입장에서는 염려가 앞선다. 자녀들이 다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그들도 처음이어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앞서고 부모라고 해도 도와줄 수 없는 한계를 느낄 때는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마지못해서 갔다 왔지만 두려움 속에 갔다 온 그곳이 너무 좋아서 계속 마음에 남아 있어 다음 기회가 되면 또 가야겠다고 기다리게 된다. 좋은 곳도 처음 도전할 때는 걱정과 염려가 앞서지만 막상 가보면 상상 이외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본문에서 보면 13절 시작하면서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면서 마지막 18절에서는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한다. 본문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며 예수님의 재림 시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슬픔 가운데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한다.

 

1. 그들은 왜 슬퍼했는가?

 

본문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단순히 소망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의 삶의 현장은 아주 힘들고 어려웠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로마의 식민지로 우리의 어린 시절보다 더 한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는 가중되는 고통이 있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눈에 보이는 어려움들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어도 복음의 확장을 막지 못했고 어려움 가운데 교회는 성장했다. 특히 신앙생활의 모습은 사도행전 2-3장에 나오듯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나름대로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임박한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시면서도 내가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시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제자들을 위시한 당시 성도들은 속히 오실 주님으로 인식하며 조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렸다.

그들의 모든 삶의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서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학수고대했다. 죽기 전에 주님이 다시 오시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자기들에게 위로와 칭찬과 상급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주님은 오시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서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불안함이 특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만연되어 슬픔과 두려움 가운데 신앙생활을 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바울이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 18절에서는 이러한 말로 위로하라고 당부하는데 슬퍼하지 말고 성도 상호 간에 서로 위로하라고 격려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2. 주님이 다시 오실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 14-15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물론 예수님의 재림 상황은 17절까지의 내용을 포함한다. 본문에서는 우리 육신의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본문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스데반의 죽음을 말하면서 잔다고 표현하고 있다.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잠을 잔다는 것은 아침이 되면 일어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모든 것이 끝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분리된다는 의미다. 육신의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말한다. 육체는 흙으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은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아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 영혼과 육체가 서로 분리되어 육신은 흙으로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 가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죽었던 모든 육체가 부활하여 주 앞에 서게 된다. 죽은 사람들은 아담 이후로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가 다시 합치된다.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현재 생존하는 사람들로 인해서도 지구는 만원인데 유사 이래로 이 땅에서 살다 간 사람들이 다 부활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 가서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퍼트려 사람들을 미혹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깨어나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부활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 일어난 것이므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부활하셨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실 줄 믿기 바란다. 그렇다면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모든 육체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것처럼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죽음에서 영혼과 육신이 하나가 되는 부활도 이루어질 것을 믿기 바란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육신은 썩거나 쇠하지 않는 부활 체로 변형되어 영혼과 다시 결합한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취하셨던 부활 체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자들도 성질이 변화되어 부활 체의 모습으로 변형되는 줄 믿기 바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는데 우리도 주의 재림 때에 입을 부활 체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다.

예수님의 재림시에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부활 체로 변형되어 사탄과 함께 무저갱으로 던져져 거기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곳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죽을 수 없고 영원한 고통 가운데 거해야 한다. 16절에 보면 주님의 재림 시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 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주의 호령이나 천사 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인간 세상의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이 부분의 말씀은 영광 가운데 찬란하게 임하시는 주의 재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림 받아 주 앞에서 자기가 행한 대로의 심판을 받게 되며 잘한 자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주어지는 줄 믿기 바란다.

 

3. 결론적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하나?

 

1) 종말론적인 신앙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종말론적인 신앙 자세는 우리에게는 종말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자세로 살아야 함을 말한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핍박과 재난과 재앙이 임하기도 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탄은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간계를 꾸민다.

전쟁과 기근과 각종 전염병의 소식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요한을 통하여 계시록을 주신 것은 우리로 두려움에 떨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현상들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심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어지는 주변 상황의 어려움에 치우쳐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심령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염려 걱정 근심이 앞선다. 그러므로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현상에만 급급하지 말고 상황 건너편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종말을 인식하지만 종말의 때는 알지 못한다. 주님의 재림의 때도 모르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시간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은 우리에게 분명히 임한다.

종말의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바로 오늘뿐이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자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그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한다. 육신 적인 일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음에 해야겠다는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주이지는 시간 속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종말이 있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의 현상만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어질 칭찬과 상급을 소망하여 매일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