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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가는 공동체(6) 섬김과 관용으로 눅 9:46-50절
2023-10-27 10:36:30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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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가는 공동체(6)

섬김과 관용으로

9:46-50

231023주일낮설교

가을이라는 계절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가을이 되면 단풍구경을 하느라 산과 들에서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가을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억새를 위시한 빛바랜 풀들의 휘날림을 볼 수 있다.

류시화의 바람 부는 날의 풀이라는 시가 있다.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이 시를 볼 때 교회 공동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 안에는 공적으로 모이던 아니면 사적으로 모이던 작은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면서 가도했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처럼 대부분의 소그룹은 구성원들의 신앙을 강화시킨다. 연약한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연약한 부분들을 서로가 잡아준다. 다른 사람의 힘이 되어 주다가 그만 연약하여 넘어지려고 할 때 또 다른 사람이 붙들어 주어 함께 버티어 주기도 한다. 반면에 관계의 갈등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실망감을 느끼고 결국에는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옆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다른 사람은 신앙의 멘토가 아니라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약한 모습이 보일 때 실망하지 말고 내가 붙들어주고 힘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시대는 너무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너무 오지랖 넓게 이 일 저 일에 대해서 참견하기 보다는 거리를 두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일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우리는 거룩해 질 수 있다. 조금 더 수준을 높인다면 자기 부인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합당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피며 성숙한 모습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1.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자.

 

본문 앞에 나오는 44절의 말씀을 살펴보자.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이 말씀을 언제 어떤 배경 속에서 하셨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다른 복음서를 보자.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런데 31절 앞의 부분에 우리 성경에는 작은 주제가 나오는데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로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다.

죽으심과 부활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장 중점적인 사역이었다.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성숙해졌다고 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무엇인가 심오한 뜻이 있는데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감히 묻지도 못했다.

예수님은 심각하게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알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엉뚱한 것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가정의 아버지가 사업에 부도를 맞아서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살던 집도 내 놓아야 하는 상황에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가 며칠 내로 적은 곳으로 이사 가야 한다고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아버지 일에 대해서 걱정하기 보다는 신나서 이사하는 날 짜장면 먹냐 고 묻고 짜장면하고 탕수육도 함께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격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떠한 자세로 주를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두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2. 섬김의 자세를 가지라.

 

본문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심각하게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메시야로서 왕위를 차지할 것이고 그때에 내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에 누가 더 크냐 라는 논쟁을 벌였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두시며 어린아이 한 명을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의 어린아이들은 상전취급을 받는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어린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귀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모든 것이 어른 중심이었다. 이스라엘 사회는 우리의 어린 시절보다 더 했다. 어린아이들의 인권이 무시당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인구수에 계수되지도 않았다. 당시 소외된 계층에 속한 대상 가운데 어린아이가 들어있을 정도였다.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는 소외받고 무시당하던 어린아이 한명을 데려다가 세워놓고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같은 계급사회가 아니라 가정과 같이 사랑으로 형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가정에는 사랑이 풍성한 곳이기에 누가 누구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 하고 서로 섬겨준다.

예전의 우리나라 가정은 유교적인 영향으로 남자들은 권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여자들은 가정 일을 다 도맡아 했고 자녀 양육도 전적으로 어머니 몫이었다. 자녀들은 철저하게 부모에게 순종해야 했다. 부모에 대해서 한마디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야 하는 가정의 형태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져서 서로가 사랑으로 섬기고 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권위를 내려놓고 가족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 결 같이 부모가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교회도 영적 가족 공동체이기에 교회 안에는 권위 대신에 사랑의 섬김이 있어야 한다.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해도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의 마음이라든지 선 듯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다. 육신적으로 피가 섞이지 않아서 서로 끌리는 정은 없을 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 자매되었다는 것을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옆에 있는 성도들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는 말씀처럼 날마다 예수님의 겸손함을 본받기를 힘쓰며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향하여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이 넘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대로 겸손을 실천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3. 관용의 마음을 가지라.

 

본문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이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했다. 이렇게 행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해주실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하셨다. 금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편 가르기를 좋아한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 사람과 유대인들이나 비슷한 부분이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가득 차 있었기에 이방인이나 자기 땅에 살고 있었지만 이방인들과 결혼해서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나 상종하려들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비난하며 손가락질 했다. 같은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형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와 함께 주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 것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고 못하게 막았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네 편 내편을 얼마나 가르는지 모른다. 자기와 같은 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용납해주고 끌어 앉고 사랑을 베풀지만 네 편은 적과 같이 생각하여 비방하고 헐뜯고 싸우기를 좋아한다. 사랑을 말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한 터줏대감인데 감히 이제 들어온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은근히 방해하기도 한다. 교회에 먼저 와서 이 교회에 익숙한 사람이면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을 잡지 못하는 성도를 향하여 먼저 손을 내밀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관용하는 마음이다. 관용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폭넓게 적용하면 잘못을 행했던 아니던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다른 말이 바로 관용이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관용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먼저 내가 괸용을 베풀고 있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에게 잘해주고 나와 가깝고 내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나와 대면 대면하는 사람에 대해서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관용을 베푸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되 자기를 죽이는 원수까지도 십자가상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것처럼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은 개인적인 경건생활만 잘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경건생활은 기본적이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겸손과 관용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 지체들이 자기 역할만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서 다른 기관도 보완해 주어야 한다. 위는 소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이지만 위가 약하면 입에서 음식물들을 꼭꼭 씹어서 내려 보내면 약한 위장기능을 보완해줄 수 있다. 위장이 약하지만 다른 기관이 협력하면 몸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화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겸손과 관용을 베풂으로 아름답고 성숙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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