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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들 시리즈(4) - 요한
2021-07-02 17:20:42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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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제자들시리즈(4)

요 한

요일 4:7-11

210627주일낮설교

예수님의 제자들을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신 시몬이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신 야고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야고보에게만 주신 별명이 아니라 그의 형제 요한에게도 함께 주신 별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을 가리켜 우레의 아들이라고 기억하기 보다는 전혀 새로운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사랑의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에게서 불리었던 이름이다.

지난 132022 카타르월드컵 지역예선 대한민국과 레바논의 축구 경기가 있었다. 후반 20분 손흥민 선수가 페널티킥으로 득점한 뒤에 카메라를 응시하며 두 손으로 23의 숫자를 만들고는 “Hey Chris! stay strong I love you” (안녕 크리스! 힘내라 사랑해) 라는 말을 남겼다.

같은 팀에서 함께 뛰었던 에릭센 선수가 경기 중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져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는데 손흥민 선수는 전에 같은 팀에서 뛰었던 친구를 생각하며 보여준 세리모니는 진한 동료애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연약한 인간으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그저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위로의 한마디를 해줄 뿐이다.

2011812일 국민일보 기자가 이어령 박사의 딸 고 이민아 목사가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을 찾아가서 도대체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이 민아 목사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할 때만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부모와의 사랑이나 한 남자와의 지독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공허했다고 한다. 늘 외로웠어요. 사랑은 상처가 됐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자살 충동도 느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났어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알면서 상처들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땅 끝의 아이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 겸손과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는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닮는 축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한 친구라고 해도 인간의 사랑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진 요한을 살펴보며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반전의 삶을 꾀한 요한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로 함께 부름 받았고 제1군에 속한 제자로 야고보와 함께 붙어 다녔다. 그리고 성격이 서로 비슷하여 각자 따로 움직이기 보다는 함께 동행 했기에 요한의 개인의 삶에 대해서 딱히 나타나는 내용이 없다. 그러나 사역 초기의 모습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열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열정이 인간적인 감정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의 선한 일에 열정적으로 감당한다는 느낌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욱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박해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타낸 반응이었지만 이것에 대해서 이어지는 55 에서는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요한의 성격은 다혈질이고 사랑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포용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혼혈족이라고 해서 유대사회에 함께 살지 못하고 따로 모여서 살아가고 있지만 같은 민족이었다.

혈통적으로 자기는 정통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의 사람이라고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편을 가르고 교만함에 치우쳐 자기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 요한은 야심가였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이 메시야로 등극하시면 자기는 그 옆에서 한자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메시야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에 유대인의 왕이 되시는 것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가 메시야로 와서 억눌려 있는 유대를 다시 일으켜줄 능력자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의 제자들이 다 그랬지만 요한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따라 다녔고 늘 옆에 있는 베드로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영광중에서 라는 말은 주님이 왕으로 세움 받게 되면 형 야고보는 주의 우편에 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은 한 마디로 사랑의 모습이었다.

요한이 기록한 책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이다. 요한 계시록은 요한이 쓴 계시록이기에 요한계시록이라고 불리어지는데 말년에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갔을 때 환상 중에 기록한 말씀이다. 그런데 요한이 기록한 서신 서를 통해서 볼 때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려 50회 이상이 나오고 있다. 요한은 변화되었고 입만 열면 사랑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를 방문했던 초기의 모습에서는 자기와 같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마리아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그들에게 저주하는 말을 퍼부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세워진 예루살렘교회의 요한은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8:14-1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것은 요한의 위선이거나 허식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요한의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약간의 변화가 아니었다. 마치 겉만 붉고 속은 하얀 사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속과 겉이 한 결 같이 붉은 비트 같은 온전한 변화를 이루었다.

요한은 삶속에서 획기적인 반전을 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약간의 변화의 시늉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 속까지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2. 어떻게 반전을 이루었는가?

 

사람들이 하는 말들 가운데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거나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타고난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방향은 전환될 수 있다. 요한의 성격을 제대로 다 파악하기는 어렵다 해도 살펴 본대로 다혈질로서 욱하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그러나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다듬어지지 않았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날카로운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열심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다른 사람에게로 방향이 바뀌니까 그들을 사랑하는데 열정적인 사람이 되고 자기 욕심을 위한 열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안위를 살피며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는 열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요한이 획기적인 반전을 이루는 삶을 살았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기를 가리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칭했다.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런 내용들을 통해서 볼 때에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그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고 늘 사랑의 결핍 현상을 겪고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고 세상의 다른 것에서 부족을 채우려고 애쓰는 인생은 가여운 존재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하게 사랑하심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복된 인생이다. 요한은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담대하게 살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눕기까지 했다.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나이가 어린 요한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되지만 요한은 예수님에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애교섞인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갔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갔다. 요한만이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의 사랑을 믿고 자기의 육신의 모친을 요한에게 맡기기 까지 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흩어져 고기잡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씩 물으시며 확인하셨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그런 질문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요한이 자기의 문제니까 언급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주님께로 향한 요한의 사랑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묻지 않으셨을 것이다.

결혼 초기의 신혼부부들에게서는 사소한 일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루를 지나면서 전화 한 통이 없다는 것 때문에 시비가 벌어진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어도 내 생각이 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남편의 사랑이나 아내의 사랑에 대하여 불확실하여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수십 년이 지난 부부에게 있어서는 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반문한다. 당신이 궁금해서 전화했다고 하면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 해야 할 일이나 신경 써서 잘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한다. 신혼 초에는 배우자의 사랑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해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오랜 시간을 지난 부부는 서로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기에 사랑을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가 그런 사이였던 것 같다. 요한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고 요한역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요한은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말하고 강조하는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다. 먼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며 체험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도 주님께로 사랑의 고백을 하며 적극적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한 사랑이 넘치게 될 줄로 믿는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며 그 사랑에 젖어 살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아름답게 나누어주는 귀한 풍성한 사랑의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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