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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5/26)
2019-06-08 17:26:42
사무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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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2:1-4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소래 교회다. 교회 역사를 보면 황해도 의주에 살았던 서상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한문을 잘 알 뿐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다. 홍삼 장사를 하면서 중국을 드나들던 가운데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 때 헌터 선교사를 만나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서상륜이 예수를 믿게 된다. 한편 스코틀랜드 출신 로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조선 땅에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상륜은 심양에서 활동하던 로스 선교사를 만났다. 로스는 서상륜의 도움으로 우리말로 성경 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1882년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심양에서 출판하였다. 그러자 서상륜은 번역된 누가복음을 가슴에 품고 국경을 넘어 오다가 압록강 변에서 국경수비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난 서상륜은 고향인 의주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외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로 피신을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송천리는 소나무가 무성하고 샘이 솟는 마을로서 우리말로 솔내인데 여기서 소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서상륜은 1883년 초가집 처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동생 서경조와 합류하여 교인들과 함께 기와집 여덟 칸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것이 최초의 교회였던 소래교회의 모습이다. 한국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이다. 그 후 서상륜은 1887년 소래 교인 세 사람을 데리고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그때 언더우드 선교사가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를 추수하러 왔다.” 이러한 사실들이야말로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교회도 설립 된 지 40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숫자에 지대한 간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지만 우리에게는 40이라는 숫자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다시 한 번 교회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형식적인 의미보다는 내적으로 강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재개발로 인하여 주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교회도 이사를 나갔다가 다시 건축하여 들어와야 한다. 이것은 외적인 변화이지 내적인 변화는 아니다. 교회의 겉모습은 달라져도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은 유지되어야 한다. 세속에 물들거나 세상 조류에 따라 적당히 변질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이루며 세상을 향하여 새 빛을 드러내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는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

 

1. 믿음으로 하나 되는 교회

 

본문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마음을 같이하는 교회가 되라고 권하는 말씀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도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실상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볼 때 완전하여 문제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다. 온전하지 못한 교회가 온전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가정과 같은 모양이다. 가정도 완전한 인격체이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맞추어가는 것이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성도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다. 이런 연약한 성도들의 구성체인 교회가 불완전한 모습이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온전한 모습을 따라 가면서 온전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 되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말씀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분열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며 나가는 것을 말한다. 목사나 장로나 성도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갈 때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 같은 사랑이라는 말도 각자의 사랑의 정도가 달라서 서로의 사랑의 정도를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일치해야 됨을 말한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같은 마음으로 나간다면 교회는 한 마음이 될 수 있다.

뜻을 합한다는 것은 전인격적으로 그 뜻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명예나 욕심이나 이름을 내는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에 뜻을 합할 때 교회는 한마음이 되어서 나갈 수 있다.

우리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어 성도 되었고 이 교회를 중심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4:4-6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4-5절 말씀 속에서 하나 한분이라는 표현이 7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원하는 것은 나누어지는 것 즉 분열을 초래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 됨을 위하여 함쓸 것인가 아니면 사탄이 원하는 분열된 모습을 이루어야 할 것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애틀로 가는 도로변에 레드우드 스테이트 파크(Red Wood State Park)라는 유명한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엄청 큰 나무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어떤 나무에는 그 밑둥에 터널을 뚫어 놓았는데, 2차선 도로 정도의 폭이 된다고 한다. 심지어 그곳에 있는 나무 중에는 장정 20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겨우 두를 만큼 되는 것도 있다. 그래서 학자들이 그곳의 나무들이 이렇게 굵고 큰 이유가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그 뿌리를 파헤쳐 보기 시작했다. 보통은 나무의 높이만큼 뿌리가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 레드우드는 뿌리가 전혀 깊이 내려지지가 않았다. 그 대신 각각의 레드우드의 뿌리가 서로 옆의 나무와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옆의 나무와 서로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가 있었고, 그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나무들 중에는 죽어 있는 나무들도 있었는데 왜 죽었는지 연구를 해보니까 다른 나무들과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쓰러져 뿌리가 뽑혀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레드우드 나무처럼 서로 믿음의 뿌리가 연결되어 믿음의 거목들이 되어 한 마음 되는 교회를 이루어 사탄의 간계를 거뜬히 물리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2.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본문에서는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다툼이라는 말은 원어 적으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이나 천박한 이기주의라고 되어 있는데 표준 새 번역에는 경쟁심으로 번역해 놓았다. 경쟁심이나 천박한 이기주의라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허영이라는 말도 공허한 견해 또는 헛된 생각으로 되어 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들어내는 천박한 이기심이나 경쟁심을 없애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자랑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더 나아가 해야 할 것이 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우수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세 명의 사람이 길을 걸어가도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라는 옛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만의 장점이 있고 아무리 어리고 모자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배울 점은 반드시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높이지 않고 무시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면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라고 되어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는 게 먼저 언급되어 있지만 진정한 겸손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 먼저다. 나를 낮추어야 다른 사람이 존중된다. 나를 높이고 있는 한은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다. 그런데 나를 낮춘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말로는 자기를 낮추고 있는 것 같아도 실상은 자기를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높이고 있다. 다른 사람과 견주어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남자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바로 자기를 들어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기를 낮추면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사탄의 속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동네 우물이 있었다. 아낙네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 제각기 머리에 이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물을 길러올 때는 반드시 바가지 하나씩을 꼭 가지고 온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야하는 깊은 우물에 왜 바가지를 들고 올까!’생각할 수 있는데 다 이유가 있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는 반드시 바가지를 물통의 물속에 엎어서 가야 한다. 아무리 물통을 가득 채워 가도 출렁거려서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물이 절반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가득 찬 물통에 바가지를 엎어 가면 출렁거리지 않아서 물을 온전히 이고갈 수 있다. 삶의 지혜다.

찰랑거리는 물통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심하게 요동치기도 한다. 때때로 시기와 질투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은 풍랑만난 듯 흔들린다. 시기와 질투로 요동치는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덮고 있으면 요동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마음처럼 겸손함을 유지하게 될 줄로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마 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겸손함은 우리가 저절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에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겸손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해서 행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격려하시며 요청하고 계시다.

죄로 인하여 사탄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으니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인 겸손을 배우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신다.

이런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맡겨진 주의 일을 감당할 때 비로소 그 가운데 사랑이 충만하게 될 줄로 믿는다. 이런 겸손함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또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섬길 때 우리 가운데는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로 소문나게 될 줄로 믿는다.

믿음으로 하나 되고 서로가 겸손함으로 섬기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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